• 전체기사
    • 서울
      R
      15℃
      미세먼지 좋음
    • 경기
      R
      16℃
      미세먼지 좋음
    • 인천
      R
      15℃
      미세먼지 좋음
    • 광주
      R
      17℃
      미세먼지 좋음
    • 대전
      R
      17℃
      미세먼지 좋음
    • 대구
      H
      15℃
      미세먼지 좋음
    • 울산
      H
      17℃
      미세먼지 좋음
    • 부산
      H
      16℃
      미세먼지 좋음
    • 강원
      R
      15℃
      미세먼지 좋음
    • 충북
      R
      17℃
      미세먼지 좋음
    • 충남
      H
      18℃
      미세먼지 좋음
    • 전북
      R
      16℃
      미세먼지 좋음
    • 전남
      R
      15℃
      미세먼지 좋음
    • 경북
      H
      16℃
      미세먼지 좋음
    • 경남
      H
      18℃
      미세먼지 좋음
    • 제주
      H
      16℃
      미세먼지 좋음
    • 세종
      R
      17℃
      미세먼지 좋음
2021-05-17 13:45 (월)
[김세곤의 역사칼럼]헤이그 특사 사건(33)
[김세곤의 역사칼럼]헤이그 특사 사건(33)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nexus386@
  • 승인 2021.05.04 10: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순종 황제 즉위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05년 7월19일 새벽에 고종의 ‘대리 청정’ 조칙이 내려지자 이완용은 곧바로 ‘황제 대리’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의식을 주관하는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스스로 궁내부 대신 임시 서리가 되어 7월20일에 오전 9시에 경운궁 중화전에서 고종과 순종 황제가 직접 참석하지 않고 내시가 이를 대신하는 권정례(權停例)로 조촐하게 치러졌다.

고종(1852~1919)은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 44년 만에 파란만장한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섰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1874~1926)이 즉위했다.(1907년 7월19일의 순종실록에는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다. 선위(禪位)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순종이 즉위식을 올리는 그 시각에 이완용의 집이 불탔다. 반일단체 동우회 회원들이 이완용의 남대문 앞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홀랑 태워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가재도구는 물론 누대에 걸친 조상 신주까지 불 속에서 사라졌다. 양자를 잘못 들인 탓에 우봉이씨 조상들의 위패가 수난을 당한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 때는 박제순이 가장 욕을 많이 먹었는데, 2년 후인 고종 퇴위를 계기로 이완용이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어 민중들의 저주를 받았다.

이완용의 가족들은 ‘매국노의 가족들을 잡아 죽이자’는 군중들의 함성에 쫓겨 남산 아래 왜성구락부로 몸을 피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이완용은 순종의 즉위식을 주관했다. 즉위식이 끝나자 이토는 서둘러 이완용을 태우고 통감 관저로 향했다.

오고 갈데없는 이완용 가족들은 이날부터 왜성구락부에 머물렀고, 두 달이 지난 9월에 형 이윤용의 집에 들어가 함께 살았다.

그런데 1908년 1월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이 ‘집도 없이 형에게 얹어 사는 이완용의 딱한 사정’을 듣고 저동에 있는 남녕위궁을 하사함으로써 이완용은 비로소 집을 장만하게 되었다.

고종은 퇴위를 강요한 이완용을 괘씸하게 생각할 만도 한데 그에게 집까지 하사한 것이다.

윤덕한은 <이완용 평전>에서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황실과 이완용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라고 평가했다. 이게 고종의 이중성이다.(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길, 2012, p 245-247)

한편, 일제는 서둘러 일본국(日本國) 천황의 축하 전보를 보내 고종의 퇴위를 기정 사실화했고,(순종실록 1907년 7월20일 1번째 기사) 순종은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와 각국 영사(領事)를 수옥헌(漱玉軒 지금의 중명전)에서 접견하였다.(순종실록 1907년 7월20일 2번째 기사)

그런데 고종의 퇴위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 시내 여기저기서 시민들의 통곡이 이어지고 수천 명이 모여 일본인들을 공격하는 폭동 사태가 연출되었다.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사>가 습격당하고, 시위군중 일부는 경운궁 대한문 앞 십자로에 수백 명이 꿇어앉아 고종에게 결코 양위하지 말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일제는 이런 군중 시위를 경찰과 주차군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처럼 막강한 물리력을 동원한 일제의 제압으로 퇴위 반대 시위는 점차 수그러들고 말았다.

순종이 즉위한 4일 후인 7월24일에 이토는 전격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한일신협약을 제시하였다.

이에 이완용은 즉시 각의를 열고 일본 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하고 순종의 재가를 얻은 뒤 7월24일 밤에 이토의 사택에서 7개 조항의 신협약을 체결, 조인하였다.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은 이렇다.

“일본국(日本國) 정부와 한국(韓國) 정부는 속히 한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한국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이하의 조관(條款)을 약정한다.

제1조 한국 정부는 시정(施政) 개선에 관하여 통감(統監)의 지도를 받을 것이다.

제2조 한국 정부의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이다.

제3조 한국의 사법 사무는 일반 행정 사무와 구별할 것이다.

제4조 한국의 고등 관리(高等官吏)를 임명하고 해임시키는 것은 통감의 동의에 의하여 집행할 것이다.

제5조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한 일본 사람을 한국의 관리로 임명할 것이다.

제6조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가 없이 외국인을 초빙하여 고용하지 말 것이다.

제7조 1904년 8월22일에 조인한 한일 협약 제1항을 폐지할 것이다.”(순종실록 1907년 7월24일 2번째 기사)

그런데 이토와 이완용은 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비밀각서를 교환하였는데, 그 내용은 군대해산, 각부 차관의 일본인 임용 등이었다.

이로써 정부 각부의 차관과 주요 국장 자리는 일본인들이 차지하여 한국인 대신(장관)은 결재만 하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조정에는 조약에 반대하거나 조약을 체결한 대신을 처벌하라는 상소 한 장 올라오지 않자, 1907년 8월11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세계 각국 사람들이여 매국노를 수입하려거든 대한국으로 건너오시오 ... 황족 귀인과 정부 대관이 다 나라를 파는 중이요”라고 통탄했다.(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p 250-251)

오늘경제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