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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8 16:00 (일)
[김세곤의 역사칼럼]헤이그 특사 사건(4)
[김세곤의 역사칼럼]헤이그 특사 사건(4)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nexus386@
  • 승인 2021.02.22 1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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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위종, 헤이그 국제협회에서 각국 기자들에게 연설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07년 7월8일 밤에 이위종은 이상설과 함께 ‘국제협회(The Foundation of Internationalism)’에 초대되었다. 국제협회는 스태드가 여성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주트너 여사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헤이그 시내에 있는 언론인 클럽이었다.

스태드는 세계 각국의 기자들 200명이 모인 가운데 약관 23세의 이위종을 ‘프린스 이(이 왕자)’로 소개하였다. 이위종은 유창한 불어로 일본의 침략에 희롱당한 조국의 처지를 ‘대한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란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그러면 이위종의 연설문을 영문과 함께 읽어보자. 이 연설문은 「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잡지 1907년 8월호에 영어로 실려 있고, 뉴질랜드 국립도서관에도 1907년 10월19일의 자료집으로 보관되어 있다.

“러일전쟁 초기에 일본 정부는 전쟁의 목적 두 가지는 첫째, 한국의 독립 유지와 영토보전, 둘째, 극동아시아 교역을 위한 지속적인 ‘문호개방’ 유지라고 공언하였습니다.”

(At the beginning of Russo-Japan war, the Japanese Government announced that it had two main objects in view - the maintenance of the independence and territorial integrity of Korea, and the continuance of the ‘open door’ for trade in the Far East.)

그랬다. 1904년 2월23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한일의정서 제3조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러일전쟁의 징후가 농후해지자 고종은 1904년 1월21일에 밀사 이학균을 통해 중국 지푸에서 전시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고 이를 각국 정부에 통고하였다.

그런데 2월8일 밤, 일본 해군은 중국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의 극동 함대를 기습공격했다. 2월9일에는 제물포에 정박한 러시아 전함 두 척을 침몰시켰다. 2월10일에 일본은 러시아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1894년 청일전쟁 때처럼 기습공격 후 선전포고한 것이다.

2월9일에 일본군이 인천을 통해 서울에 들어왔다. 도성 사람들은 도망치고 구중궁궐도 텅 비었으며 조정 대신들도 숨기에 바빴다. 2월12일에는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브(A. Pavlow)가 서울을 빠져 나갔다.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일본 공사 하야시는 대한제국에 대하여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을 것을 강요하였다. 대외 중립 유지가 어려움을 인식한 고종은 하는 수 없이 2월23일에 일본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1904년 2월23일의 「고종실록」을 읽어보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되었다.[광무(光武) 4년(1900년) 북청사변(北靑事變) 후 러시아는 만주(滿洲) 일대에 군사를 체류시킨 채 기한이 되도록 철수하지 않았다. 비록 일본·영국 양국이 동맹으로 그에 대응하고 미국도 항의하였으나 러시아는 응하지 않다가 1903년 4월에 이르러 군사를 출동시켜 멋대로 우리나라 용암포를 차지하였다. 일본은 반도(半島)의 존망이 그 안위(安危)와 관계된다고 여겨 몇 달을 절충하였으나 해결이 나지 않았다. 러시아가 도리어 군사 장비를 증수(增修)하자, 2월6일에 이르러서는 두 나라 사이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9일 일본 함대가 러시아함을 공격하여 인천에서 2척을 격파하자 러시아 함은 퇴각하다가 인천항에서 자폭 침몰하였다. 10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2일 러시아 공사(公使) 파블로프가 서울을 떠나 귀국하였다. 이에 이르러 국면은 급변하였고 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의정서(議定書)〉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외부대신 임시서리 육군참장 이지용과 대일본제국 황제 폐하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는 각각 상당한 위임을 받고 다음의 조목을 협정한다.

제1조 한일 양국 사이의 항구적이고 변함없는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고히 이룩하기 위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확고히 믿고 시정(施政)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

제2조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을 확실한 친선과 우의로 안전하고 편하게 한다.

제3조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정황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위 대일본제국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한다.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여 이용할 수 있다.

제5조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간에 승인을 거치지 않고 뒷날 본 협정 취지에 어긋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을 수 없다.

제6조 본 협약에 관련되는 미비한 세부 조항은 대일본제국 대표자와 대한제국 외부대신 간에 정황에 따라 협정한다.”

 

오늘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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