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8년에 들어서면서 대한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거셌다. 1월 초에 러시아 해군 제독 두바소프는 군함 시우치호를 부산에 입항시키고 수병을 절영도에 상륙시켰다. 그는 절영도(지금의 부산 영도)에 석탄고 기지 설치를 요구하였다. 러시아는 1897년 8월부터 절영도에 석탄고 기지 조차를 요구해 왔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1월31일에 외부대신으로 이도재가 임명되었다. 그는 러시아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의정부에 의견을 조율하고자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도재가 병으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자 고종은 2월16일에 탁지부 대신 민종묵에게 외부대신 서리(署理)를 겸직시켰다.
2월19일에 플랑시 주한 프랑스 공사는 ‘러시아 대표의 저탄소 부지 계획안 실행 시도와 신임 외부대신과의 관계 보고’를 프랑스 외무부에 보고했다.
“지난 1월31일에 임명된 신임 외부대신 이도재는 건강을 이유로 휴직했고, 2월16일에 민종묵 탁지부 대신이 서리로 외부를 맡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공사 스페이어는 신임 대신과 부산 근처에 있는 절영도에 러시아 해군을 위한 저탄소 설치와 관련하여 회담을 재개하려 했습니다. 대한제국이 이미 일본에게 부여한 특혜를 러시아에게 거절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스페이어 씨는 어떤 문제도 없다고 보고 있고 대한제국 정부도 이에 동조할 것으로 보입니다.”
플랑시 공사의 예측대로 외부 서리 민종묵은 의정부의 논의도 거치지 않고 절영도 조차를 독단적으로 러시아에 허가하였다. 이러자 의정부 참정·찬정은 2월27일에 그 불법성을 지적하고 사직 상소를 올렸다.
3월2일에 외부대신 이도재가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했다.
“삼가 절영도에 러시아 공사가 청한 석탄 창고 기지를 조차해주는 안건은 일이 매우 중대하여 신의 부(部)에서 함부로 허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미 의정부에 청의(請議)를 거쳤는데, 아직 종결을 짓지 못한 상태에서 해당 지역을 다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본래 각국의 조계지로 의정하였다고 일컬어지는 곳으로, 지난 겨울에 각 공사관에서 조회하는 문건이 왔다 갔다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때 대신 민종묵이 영국 영사에게 회답한 글에서, ‘떼어 준 각 국 조계지는 절대로 다른 용도로 바꾸어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원래 한번 정해진 이치이다.’라고 하였으니, 역시 외부에서 갑자기 허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어 일본, 미국, 영국, 독일의 공사와 영사를 모아 놓고 지도를 살피면서 그 조계지의 확정 여부를 두루 물어보니, 모두 명백히 알고 있었고 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단지 러시아와 프랑스의 두 공사가 참가하지 않은 관계로 논의를 완결 짓지 못하였는데, 수석 공사가 해당 공사관에 재차 모여서 공의를 타결짓자고 자청하였으므로 그대로 즉시 조회를 보냈고, 미처 회답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신이 마침 병으로 인하여 말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얼마 전에 서리 대신 민종묵이 중론을 배제한 채 혼자 결정하여 러시아 공사가 청한 것을 허가해 주었습니다. 또 일본 공사관에 서한을 보내어 해당 지역은 원래 각국의 조계지가 아니라고 일일이 변명하였으니, 신은 의아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대체로 지난날 영국 공사관에 회답을 보낸 사람이 바로 오늘 일본 공사관에 서한을 보낸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한 입으로 어떻게 전후로 이렇게도 판이하게 다른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일은 의정부의 재결을 기다려 각 공사와 타당하게 의논할 일입니다. 그 뒤 사안별로 허가 여부를 결정하는 일은 우리나라가 가진 고유 권한인데, 어떻게 이렇게 서두른단 말입니까?
신이 우려하는 것은 각 국이 이미 그 조계지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질책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올 것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처럼 연약하고 무능한 사람은 그러한 비난을 이리저리 막아내면서 이런 국면을 적절하게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인물이 결코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외부와 의정부의 직임을 속히 체차(遞差)하고 현재 상황을 구제할 수 있는 인재를 선발해서 계책을 신속히 강구하게 하소서.”
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경은 이미 의정부에 청의하였는데, 어째서 이렇게 가겠다고 하는가? 그러나 실제 병이 이와 같으니 부득이 청한 바를 특별히 윤허한다.”(고종실록 1898년 3월 2일 2번째 기사)
고종은 외부서리 민종묵의 처사에 대하여는 한마디 말도 없이 이도재를 사직 처리했다. 고종의 의중이 러시아에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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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의 역사칼럼]외국인이 본 한말(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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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2 | 김세곤의 역사칼럼 -
[김세곤의 역사칼럼]외국인이 본 한말(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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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의 역사칼럼]외국인이 본 한말(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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