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헐버트와 비숍은 독립신문에 이어 독립협회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다.
먼저 ‘파란 눈의 애국자’ 헐버트가 1908년에 쓴 『대한제국 멸망사』 ‘제10장 독립협회’를 읽어보자.
“얼마동안 한인들 사이에 비밀 결사가 존재했는데, 그들의 정치적 강령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독립되는 것으로서, 바꾸어 말하면 ‘조선인을 위한 조선’을 이룩하는 일이었다.
이제 왕이 일본인들에 의해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다시 자신의 힘으로 일본인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자, 서재필 박사 영도 아래의 이 작은 단체는 소위 독립협회라는 것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립협회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피난 중인 1896년 7월2일에 창립한다.
헐버트의 글은 이어진다.
“그 단체의 이름은 단체의 성격을 일부분밖에는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독립협회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반면에 왕의 대권을 대폭 감소하고 온정주의가 제거된 소위 순수한 입헌 군주제의 형태를 따르는 자유주의적 정치제도에 더욱 역점을 둘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애당초 조선 독립의 일반적인 원칙에 역점을 두었으며, 그 단체에서 새로이 발견된 자유주의를 이쁘게 여긴 왕은 이에 대해 충심으로 동감하게 됐다. 독립협회는 왕으로부터 재가를 받게 되자 정처 없는 출범을 시작했다가 완전히 파선된 채로 종막을 거두었다.
독립협회는 청년들로 조직됐으며, 그들 중 대부분이 애국적인 정열을 의심할 나위가 없으나 당면한 정치적 험로와 여러 가지 장애를 직접 경험한 적이 없었다.(헐버트 지음·신복룡 역주, 대한제국 멸망사, 집문당, 2019, p 190)
‘독립협회가 정처 없는 출범을 시작했다가 완전히 파선된 채로 종막을 거두었다.’는 표현은 참으로 명문이다.
고종의 후원을 받아 1896년 7월2일에 출범한 독립협회는 1898년 12월에 고종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공화제를 도모한다는 음모론에 고종이 발끈한 것이다. 그리하여 군대와 어용단체 황국협회를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고종은 위로부터의 개혁(1884년 갑신정변)도 아래로부터의 혁명(1894년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위와 아래가 연합한 개혁(독립협회, 만민공동회)도 왕권 강화 유지에 급급하여 모두 무너뜨렸다. 오로지 고종만이 존재하는 ‘짐이 국가’인 절대군주제였다(게일 목사가 1909년 『전환기의 조선』에서 표현함). 이는 1899년에 만든 ‘대한국 국제’에 잘 나타난다.
이어서 비숍 여사의 글을 읽는다.
“북경로 근처에 있는 우아한 영은문은 몇 대에 걸쳐 조선의 국왕이 중국의 칙사를 맞이하는 곳이었으나 이제는 없어졌다. ...
영은문이 헐려진 자리의 가까이에 있는 폐궁을 건물로 사용하고 있는 독립협회는 국가의 독립을 축하하고 보전하고자 창립되었다. 비록 가입비가 비쌌지만, 이미 회원이 2,000명에 이르렀다.”(비숍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집문당, 2019, p 452-453)
독립문은 자주 독립국의 상징으로 1895년 1월에 헐린 영은문(迎恩門)이 서 있던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자는 서재필의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1896년 6월2일 『독립신문』 논설에는 독립문 건립 취지가 실려 있다.
“독립문이라는 새 문을 세우는 뜻은 세계 만국에 조선이 자주 독립국이란 표를 보이자는 뜻이요. ⋯ 남의 나라에서는 승전을 한다든지 국가에 큰 경사가 있다든지 하면 그 자리에 높은 문을 짓는다든지 비를 세우는 풍속이라. 그 문과 그 비를 보고 인민이 자기 나라의 권리와 명예와 영광과 위엄을 생각하고 더 튼튼히 길러 후생들이 이것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자는 뜻이요, 또 외국 사람들에게 그 나라 인민의 애국하는 마음을 보이자는 표시라”
서재필의 제안에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실추된 왕권 회복을 위해, 정동파 내각은 정권의 주도권 확보 차원에서 독립문 건립에 찬성하였다.
6월 말경에 고종이 독립문 건립을 재가하자 서재필 등은 곧바로 독립문 건립을 위한 협회 창설에 착수했고, 7월2일에 창립총회가 열렸다.
오늘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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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의 역사칼럼]외국인이 본 한말(12)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과거를 되풀이하게 되어 있다. -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4블록 입구 -1896년 4월7일에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7월2일에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고 11월21일에 옛 영은문 자리에서 독립문 기공식을 하였다. 당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피난살이(아관파천) 중이었다.독립신문과 독립협회에 관하여는 영국의 비숍 여사가 1897년에 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과 파란 눈의 애국자 헐버트가 1908년에 쓴 『대한제국 멸망사』 책에 기록되어 있다.먼저 『독립신문』부터 살펴보자. 비숍은 책 제3
2021-01-11 | 김세곤의 역사칼럼 -
[김세곤의 역사칼럼]외국인이 본 한말(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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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 김세곤의 역사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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